한국식 행복과 미국식 만족

“언니는 맥시마이저(maximizer)야, 아니면 새티스파이어(satisfier)야?”

어느 토요일 아침 요가 클래스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후배가 이렇게 물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새로 나온 로봇 이름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게 뭔데?”라고 되물었다.

후배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최대만족을 추구하는 ‘맥시마이저’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새티스파이어’다.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맥시마이저는 항상 ‘더 많이’ ‘더 높이’를 추구한다. 직장도 제일 좋아야 하고, 가장 일을 잘한다는 인정도 받아야 하고, 남보다 월급도 더 많이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성취도도 높고 성공할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이 옆에 있는 한,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한, 맥시마이저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맥시마이저는 쉽게 행복해질 수가 없다. 맥시마이저는 하다 못해 쇼핑을 할 때도 다른 데서 더 좋은 것을 팔거나 같은 물건을 싸게 팔까봐 불안한 사람들이다. 우울증 환자들 중에 바로 이 맥시마이저형(型) 인간들이 많다고 한다.

반면 새티스파이어는 ‘이 정도면 됐잖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나는 안정된 직장이 있잖아” “조그만 아파트지만 그래도 내 집 한 채 있으니 걱정없어”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마음이 편하다면 새티스파이어다. 새티스파이어는 현실에 자족하기 때문에 변화나 상승의지가 약하다. 그러니까 상대평가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이 이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이 참 공평하다. 맥시마이저는 많이 이뤄도 불행하고, 새티스파이어는 행복하지만 별로 내세울 게 없다. 맥시마이저와 새티스파이어라는 잣대로 친구들을 한 명씩 떠올려봤더니 이상하게도 한국 친구들 중에는 맥시마이저가 많고 미국 친구들 중에는 새티스파이어가 많다. 이를 테면 한창 잘 나가고 있는데도 그것으로 부족해서 박사학위나 자격증 따는 계획에 골몰하면서 일부러 일을 만들어 괴로워하는 것은 한국 친구들이다.

미, 경쟁에서 밀려도 낙오되지 않아

반면 미국 친구들 중에는 “책임이 더 무거워지고 일도 더 많이 해야 한다면 승진도 싫고 더 많은 보수도 싫어. 나를 지금 이대로 내버려둬 줘”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뉴욕의 금융가에서 일하던 친구 동생이 목표한 만큼의 돈을 번 후 과감하게 직장을 때려치우고 남부의 작은 도시로 이사를 갔다. 얼마나 많이 벌었으면 그럴 수 있을까 부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벌 수 있는데도 거기서 멈출 수 있는 의지가 놀라웠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이 모두 새티스파이어라는 뜻은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가 있다면 미국에는 새티스파이어들이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갈 여유 공간이 넓다는 것이다.

경쟁의 강도로 말하자면 미국이 더 가혹하고 치열하며 잔인하다. 하지만 맥시마이저들의 피튀기는 경쟁가도에서 과감하게 탈퇴해도, 패자로 굴러떨어지지 않고 다른 의미를 찾아 살 수 있는 안전장치와 탈출구가 있다. 성공과 행복의 정의는 각자 내리는 것이라는 믿음이 통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왜 보통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행복을 좇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여유가 쉽게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한국이 국가적·국민적 맥시마이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는 강렬한 변화와 상승의지는 아마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낸 원동력일 것이다. 하지만 맥시마이저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대로 좋아’라고 생각하는 새티스파이어가 설 자리는 좁디 좁다.

행복한 새티스파이어로 살자니 새로운 도전이 없는 지루한 인생이 될까 두렵고, 불행한 맥시마이저가 되자니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다. 맥시마이저냐, 새티스파이어냐, 정말 어려운 선택이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특파원(insu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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